[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가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대로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좋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위는 《세종실록》 12년 7월 5일 치 기록입니다. 세종임금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닐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도 꿰뚫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새종은 들판을 지나갈 때면 일산(日傘, 양산)과 부채를 쓰지 않았으며 말을 타고 가다가 농부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세종은 공법이라는 세제개혁을 시행하기에 앞서 직접 경기도 장단현 들판을 답사하기도 할 정도로 백성사랑에 철저했던 세종임금이지요. 이달 15일은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2024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충청북도 진천군 영수사(靈水寺) 소장 보물 <진천 영수사 영산회 괘불탱>(아래 영수사 괘불)을 소개하는“영산(靈山)의 모임-진천 영수사 괘불(24.5.1.~10.13.)”을 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괘불전은 사찰 소장 괘불의 문화적 값어치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2006년부터 선보여 온 전시로 올해로 열아홉 번째를 맞이한다. 가장 오래된 괘불 가운데 하나, 보물 <영수사 괘불> 괘불(掛佛)은 죽은 자의 영혼이 부처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천도재(薦度齋)와 같은 불교의식에 쓰인 불화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이후 불교의식이 활발하게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1653년(효종 4)에 제작된 <영수사 괘불>은 현전하는 괘불 117점 가운데 조성시기가 이른 괘불로 값어치가 크다.(도1) 괘불 화면 아래쪽에 다양한 인물군이 등장하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정형화된 괘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소로 이른 시기 괘불의 양상을 보여준다.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괘불 <영수사 괘불>은 전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직무대리 윤도식)은 2024년 4월 30일(화)부터 7월 15일(월)까지 기획전시실 2에서 특별전 《아버지》를 연다. 가정의 달을 기려 마련된 특별전으로 ‘아버지의 가족 사랑’을 주제로 한 전시다. 전시에는 일반 시민 100여 명이 참여하여 사연과 사진, 이야기, 물건 등을 공개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눈다. 또한 아버지 정약용의 마음을 담은 하피(첩霞帔)帖과 아버지 김교철(金敎哲)이 1934년 아이를 위해 천 명의 글자를 받아 만든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 등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소장품과 자료 등 150여 점을 소개한다. □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아빠들은 다르다” 요즘 아빠들은 가사와 육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육아휴직을 사용한 남성은 54,240명으로, 전년보다 28.5%(12,043명) 늘었으며, 전체 휴직자 가운데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남성의 육아휴직 문화가 확산하고, 저출산 해결 방안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면서 정부에서는 남성 육아휴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요즘 젊은 세대는 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790년(정조 14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이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하여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있습니다. 이 책은 《무예통지》ㆍ《무예도보》ㆍ《무예보》라고도 하며,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또는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라고도 불립니다. 목판본으로 4권 4책의 한문본에 1권의 언해본(한글 해석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정조의 뜻이 실려있지요.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ㆍ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펴냈고, 다시 마상(馬上)ㆍ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된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것입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군의 교육용 교본이었던 만큼 사본들이 역사적 사료치고는 온전하게 많이 남아있는데 2017년 북한이 먼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렸습니다. 남한에서는 2019년에 《전통군영무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완 성 - 나태주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아내 없으면 밥 안 먹는 사람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서울 딸네 집에도 못 가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절제와 담백함으로 빚어내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가 아름다운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큰 항아리를 한 번에 굽에서부터 몸체, 어깨, 아가리까지 물레로 성형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이렇게 붙이면 붙인 부분이 굽는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완전한 원형을 이루기가 어렵다. 따라서 달항아리는 살짝 이지러져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형이라고 모두 같은 대칭의 원형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현정 학예사는 “이러한 형태는 고요하기만 한 듯한 달항아리에 미세한 움직임과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실제 달과 같이 둥글고 자연스럽고 또 넉넉한 느낌을 준다. 분명 담박한 선으로 표현된 부정형의 정형을 보여주는 달항아리의 형태는 어디에도 없는 조선만의 형태다.”라고 말한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라는 평가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5년 극장가에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와 최초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종필 감독의 <도리화가>가 상영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많은 여성 소리꾼을 만날 수 있지만 그때는 여성 소리꾼이란 상상할 수가 없었지요. 신재효는 어렵게 진채선을 제자로 받아들여 으뜸 명창으로 키웠는데 진채선은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에서 뛰어난 소리를 보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고창군 모양성 앞에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를 기리기 위한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이 세워져 있습니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 곧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기에 이 여섯 마당은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신재효는 자신의 집을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으며 이 소리청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많은 소리꾼을 키워냈고,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 때로는 그들 가정의 생활비까지도 대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또 유달리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주었고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일제강점기 잡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호모화의 유입은 1919년경부터 개시되어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소량에 불과했으나, 1921년 봄 무렵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자마자 별안간에 조선인들의 환영을 받아 도시에서 시골로 보급되고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잡지 《조선》은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말은 곧 ‘고무신’을 이르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말을 빌려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양화형(洋靴型) 곧 단화 형태로 나왔지만, 나중에 조선식으로 개량해 선화형(鮮靴型)이 나온 뒤 도시는 물론 시골 두메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린 듯합니다. 이러니 다투듯 고무신 공장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대륙고무공업’은 광고 문안에 순종 임금은 물론 모든 궁인이 다 대륙고무가 만든 고무신을 애용한다고 광고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기를 끌었던 고무신에 큰 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던 수원 화성행궁이 119년 만에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됐다. 화성행궁 우화관ㆍ별주 복원사업이 끝나면서 1989년 시작된 화성행궁 복원사업이 35년 만에 마무리됐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 읍치 자리(화성시 융릉)로 이장하고, 신읍치를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1789년(정조 13년)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평상시에는 관청으로 쓰다가 임금이 수원에 행차할 때는 임금과 수행 관원들이 머무는 궁실(宮室)로 이용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신도시 수원화성의 행정을 도맡았던 관청이자 화성유수부를 굳건하게 지킨 장용영 군사들의 군영이었다. 수원화성 축조 과정이 기록된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행궁은 약 600칸 규모로 정궁(正宮) 형태다. 정조가 훗날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머물고자 만들었기에 화성행궁 규모와 격식이 궁궐에 버금간다. 조선시대 지방에 건립된 행궁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옮긴 1789년부터 모두 13차례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행궁에서 거행했다. 19세기 말까지 궁실이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완창판소리 - 조주선의 심청가>를 5월 11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이자, 탁월한 소리와 극적인 발림의 대가 조주선 명창이 강산제 ‘심청가’를 들려준다. 조주선은 예향(藝鄕)으로 불리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국무용과 가야금을 섭렵했고, 중학생 무렵 우연히 판소리를 듣고 매료되어 김흥남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며 소릿길에 입문했다. 성창순 명창 문하에서 오랫동안 ‘춘향가’와 ‘심청가’를, 김수연ㆍ안숙선 명창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김일구 선생님에게 적벽가를 배웠고 여러 명창을 사사하며 꾸준히 공력을 다져왔다. 조 명창은 소리의 각 대목에 담긴 정황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며, 청중이 정서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호소력 짙은 무대를 선보인다고 평가받는다. 1993년 국립국악원 전국국악경연대회 종합대상, 1999년 남원춘향제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일반부 대상,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받으며 꾸준히 실력을 입증했다. 국내 유수의 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은 물론, 국내를 넘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범피중류(泛彼中流), 등덩둥덩 떠나간다. 망망헌 창해(蒼海)이며 탕탕헌 물결이라.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으로 날아들고, 삼강의 기러기는 한수로 돌아든다. 요량헌 남은 소래, 어적(漁笛)이언마는 곡종인불견에 수봉만 푸르렀다.” (아래 줄임) 어제 4월 21일 낮 2시 서울 삼성동 국가무형유산 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 유영애 명창의 강산제 판소리 완창 공연에서 심청가 가운데 눈대목으로 널리 알려진 ‘범피중류’가 유영애 명창의 구성지며 중하성에 강한 소리로 울려 퍼졌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해설을 맡은 광주시립극장 장명한 수석은 “유영애 명창은 심청가'와 '흥보가' 등 60여 회 넘게 완창 무대를 펼쳐왔다. 오늘로써 완창이 61회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그 엄청난 공적을 유 명창은 만들어 냈다.”라고 감탄했다. ‘완창(完唱)’이란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문학사전》에 “판소리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부르는 일. 박동진(朴東鎭)이 1968년 9월 30일 서울 남산에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 강당에서 다섯 시간 반에 걸쳐 <흥보가(興甫歌)>를 처음부터 끝